김홍국 하림 회장 “‘병아리 10마리’ 성공신화 주인공”

이동규 기자 발행일 2016-09-13 22:07:23 댓글 0

나폴레옹의 도전 정신을 토대로 국내에서 업계 1위를 유지하고 있는 하림은 ‘집중’과 ‘도전’ 정신으로 무장한 채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특히 하림 김홍국 회장의 ‘닭’에 대한 그의 열정은 어떤 기업인보다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병아리 10마리, 하림의 출발


닭고기 명가 하림의 첫 시작은 김 회장의 외할머니가 잘 키워서 몸보신하라며 선물한 병아리 10마리였다. 초등학교 4학년의 나이에 병아리 10마리를 키우게 된 그는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해 키우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의 김 회장은 병아리 10마리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미꾸라지와 개구리를 잡고 부모님 몰래 쌀독에서 쌀을 퍼내 먹이기도 했다. 그 결과 10마리의 병아리는 건강하게 자랐고 첫 사업 자금이 됐다.


당시 한 마리에 250원이던 닭은 총 2500원에 거래됐고 그 돈으로 다시 7원짜리 병아리 100마리를 살 수 있었다. 병아리를 키우던 어린아이의 취미생활이 작은 사업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는 이후 고학년이 돼가면서 닭뿐 아니라 돼지와 염소도 키우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접어들어서는 새벽잠을 떨치고 일어나 10리나 되는 거리를 리어카를 끌고 가 물엿 공장에서 나오는 찌꺼기를 구해 돼지에게 먹인 뒤 등교하기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는 오직 가축 기르는 일에만 전념하고 싶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원하던 농고에 진학해 자신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전국영농학생 전진대회’에 출전, 원예와 축산 부문에서 우승을 거머쥐기도 했다. 또한 양계장을 직접 설계 시공해 1000여 마리가 넘는 닭을 키우고 돼지도 30여 마리로 늘렸다. 이론과 실전을 함께 익히며 꿈을 키워나간 것이다. 고교생 사업가로 자리 잡은 그는 볏짚을 납품하는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더불어 당시 공무원 월급이 20만원이던 시절에 월 수익 300만을 내며 사업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렇게 돈을 모은 김 회장은 4000만원의 자본금으로 18세가 되던 해에 지금의 하림그룹 모태라 할 수 있는 황동농장을 설립해 양계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다. 학교도 졸업하고 일에도 전념할 수 있다 보니 사업도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사업의 탄탄대로는 길게 펼쳐지지 않았다. 젊은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이것 저것 즐기는 재미에 빠져 사업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졌고 1982년에는 전국적인 닭 값 폭락사태가 몰아닥치면서 그간 모든 성과들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돼 버렸다. 사업은 무너졌고 김 회장은 빚쟁이들에 쫓겨 돼지막사에서 날을 지세는 신세가 됐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계속해서 사업실패로 시름에만 빠져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사업의 꿈을 잠시 접어둔 뒤 한 식품회사의 영업사원이 됐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시간을 내 각종 서적과 논문을 뒤지며 닭에 관한 것이면 무엇이든 정보를 얻고 지식을 쌓아 나갔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강연회에서 통합경영이라는 경영이론을 접하게 됐다.


통합경영이론은 돼지 값이 폭락해 졸지에 빚쟁이 신세가 되었던 시절 동네가게에 진열된 소시지를 보면서 ‘왜 돼지고기로 만든 소시지 값은 그대로일까?’하던 의문을 단번에 풀어줬다. 배추나 무, 닭이나 돼지는 때가 되면 값이 폭락하고 어느 시기가 지나면 값이 폭등했다. 종종 벌어진 일이지만 당시에는 수확을 앞둔 배추밭 수박밭을 뒤엎고 새끼돼지들을 길거리에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농축산업이 투기사업이 되어 배추파동, 수박파동, 돼지파동이 나면 농민들이 빚을 못 이겨 야반도주하는 일들이 주기적으로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1차 농축산물에 부가가치를 만들어 2차 가공식품으로 만들고 이를 시장에 내다파는 삼장(농장-공장-시장)통합경영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닭이나 돼지에 먹이는 사료도 직접 조달하면 원가를 절감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병아리도 마찬가지였다. 생산원가는 물론, 물류구조의 개선, 유통마진의 확대 등에 대한 생각들이 사업의 기초로 자리매김했다.


이렇게 삼장통합의 밑그림을 완성한 그는 1986년 다니던 식품회사에 사표를 내고 2년 동안 모은 돈으로 다시 양계장을 인수해 재기에 나섰다. 이후 그는 삼장통합 경영시스템의 구현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제일 먼저 한 것이 업게 최초로 병아리의 계약사육 시스템 도입이었다.


회사는 부지 매입과 인건비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대신 계약 농가에 시설재, 종계, 사료 및 모든 관련 부재료를 공급하는 조건으로 계약사육을 실시했다. 농가는 사육한 대가만큼 경제적 보상을 받게 되므로 결국 수익이 안정되고 생산원가를 최소한으로 할 수 있는 윈윈(win-win) 방식을 찾아낸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사육규모를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1987년에는 뜻을 같이하는 주주를 모집해 지금의 ㈜하림을 설립, 이리도계장을 인수할 수 있었다. 김 회장은 가공공장을 확보함으로써 사육, 가공, 판매를 통합하는 삼장통합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림은 1988년 8월 정부로부터 육계 계열화업체 지정을 받았다. 이는 삼장통합경영 시스템이 정부에 의해 공인된 순간이었다. 특히 8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는 닭고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198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면서 일명 ‘양념치킨 체인점’이 들어선 것이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하림의 사업도 급성장했다. 한때는 주문이 너무 밀려들어 당시의 설비로는 주문량을 소화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기도 했다.


삼장통합경영의 경쟁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2년 하림은 국내시장에서 업계 1위로 올라섰다. 1995년에는 국내 농축산물 중 최초로 KS 마크를 획득했고 1998년에는 ISO 9001 인증을 획득하며 닭고기 산업에 새로운 이정표들을 세워나갔다. 그리고 1997년 9윌에는 숙원이었던 육가공 공장을 마침내 완공하며 닭고기 소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우리나라 닭고기 산업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 삼계탕에 대한 유래와 제조공정, 조리법과 같은 정보를 총망라한 글로벌 삼계탕 웹사이트도 운영하면서 삼계탕 세계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중국어를 비롯해 영어, 일본어 등 다국어로 서비스되는 이 웹사이트에는 삼계탕 조리법을 외국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동영상도 게재되어 있어 우리나라 삼계탕에 대한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이문용 하림 총괄사장은 “하림의 철저한 품질관리를 통해 13억 중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겠다”며 “이를 통해 한국 고유의 전통 음식인 삼계탕 세계화에도 함께 힘써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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