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현장 보고서와 연구는, 보육원에서 오래 자란 청소년들에게 낮은 자아존중감과 높은 의존성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기주장과 독립성을 길러 주는 자립준비프로그램의 필요성이 오래도록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이 경향을 한 사람의 결함처럼 읽어서는 곤란하다.
어른의 한마디에 자기 자리가 흔들리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어른의 눈치를 먼저 익히는 일은, 어쩌면 가장 본능적인 생존의 기술이었을 테니까. 거절을 모르는 청년의 뒤에는, 거절해도 안전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아이가 서 있다.
거절을 잘 못 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착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다른 결이 있다. 관계가 깨질까 두려운 마음, 상대의 실망을 견디기 어려운 마음, 자기 욕구보다 타인의 평가를 늘 먼저 두는 습관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
특히 거절을 '관계의 단절'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결국 자신을 지킬 힘이 약하다는 뜻이다.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은 관계 안에서 자기 욕구를 안전하게 표현해 본 경험이 부족하거나, 거절했을 때 관계가 끊어질 수 있다는 불안을 일찍 학습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거절할 수 있는 용기란 버릇없는 태도가 아니라 자기 삶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자립 기술이다. 그러나 사회로 나온 이 청년들에게서 이 용기는, 안타깝게도 한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자기 경계선이 약한 이들은 착취적인 사람에게 쉽게 걸려든다. 최악의 경우 범죄에 이용되어, 인생에서 가장 빛나야 할 이십 대를 송두리째 잃기도 한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남자친구가 '사랑한다'는 말로 꼬여 학생을 성을 착취하는 경우처럼, 범죄에 이용되고 버려지는 사례가 종종 보인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그렇게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충격은 거대하고 회복탄력성은 낮으니, 몇몇 청년들은 끝내 다른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보호 종료 후의 시간은 유난히 길고 또 적막하다.
어제까지 수십 명이 부대끼던 공간에서 빠져나와,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방으로 들어서는 첫 밤. 그 적막을 처음으로 깨뜨려 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우리는 그 손을 너무 쉽게 잡아 버린다.
'내 편이 생겼다'는 그 한순간의 안도가, 평생을 흔들 결정을 너무 빨리 내리게 만든다. 다음의 두 이야기는, 그렇게 잡아 버린 손에 관한 기록이다.
여자친구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요!
A는 초등학생 때 네 살 터울의 동생과 함께 보육원에 입소했다. 그 순간부터 '동생은 내가 지킨다'는 사명감을 마음에 새기고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장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공장에 들어갔지만, 일은 생각보다 고되고 돈을 모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던 A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게임을 통해 알게 된 그녀와 사귄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여자친구는 A에게 새로운 제안을 건넸다. 해외에 나가서 함께 돈을 벌자는 것이었다. 큰돈을 벌 수 있고 해외에서도 살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했다.
사귄 지 한 달, 가장 알콩달콩하던 시기였으니 그녀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솟았다.
보육원에 남아 있는 동생이 퇴소하기까지는 아직 3년이 남아 있었으니, 그 사이 돈을 두둑이 모아 동생이 나왔을 때 번듯한 오빠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계산도 들었다.
게다가 몸 쓰는 일도 아닌 사무직이라니, 더할 나위 없었다. 똑똑하고 야무진 여자친구가 서류까지 모두 꼼꼼히 챙겨 주는 모습에 A는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렇게 제안을 수락한 보름 뒤, A는 여자친구와 함께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도착하니 한국인 형들이 많았고, 그들은 A를 살갑게 맞아 주었다. 키가 작고 왜소해서 학창 시절 같은 학교 형들에게 걸핏하면 맞고 다녔던 A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 형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따뜻했다.
그러나 그 회사는 보이스피싱 조직이었다. 처음 2주 정도는 범죄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평범한 회사로만 알았다가 범죄 조직임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여권이 모두 빼앗긴 뒤였다.
일은 괴로웠지만, A는 자기 자신보다 여자친구가 더 걱정이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여자친구도 그 조직의 일원이었고, 이런 방식으로 이십 대 초반의 남자를 꼬여 범죄에 이용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그 사이 한국에 남은 동생은 난리가 났다. 자주 통화하던 오빠가 중국에서 돈을 벌어 온다더니 어느 날 연락이 뚝 끊겨 버린 것이다.
답답한 시간이 1년이 흐르고, 동생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오빠와 다시 연락이 닿았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동생은 먼저 안도부터 했다. 오빠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러나 곧 오빠를 그곳에서 빼내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동생은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고3 2학기가 되자마자 취직했고, 직장 생활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동생이 스무 살이 되던 해 11월, 동생은 범죄 조직에 거금 1천 5백만 원을 건네고서야 오빠를 데려올 수 있었다.
A는 처음 그곳에 들어갔을 때보다 몸무게가 8kg 이상 빠진, 말 그대로 앙상한 뼈만 남은 채 한국에 돌아왔다.
다행히 초범이고 속아서 범죄에 이용된 점이 참작되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A가 고백한 말이 있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어렴풋이 '이건 불법적인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자친구에게 가기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면 여자친구가 자기만 두고 떠나 버릴까 봐, 그게 그때는 너무나 무서웠다고. 그리고 그날 가기 싫다고 말하지 못한 자신을, A는 지금까지도 원망하고 있다.
사랑으로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어요
그렇다. 사랑이라는 이름은 위대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을 준다. 하지만 살다 보면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하찮고 또 얼마나 무력한지, 뼈저리게 체감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B는 고등학생 때 보육원을 나왔다. 잔소리하는 생활지도원 선생님도 싫었고, 공부에도 별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작정 보육원을 뛰쳐나온 B는 같이 가출한 친구들과 자신이 어떻게 다른지를 거리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거리에서의 삶이 생각보다 고단했던 친구들은 하나둘 다시 가정으로 돌아갔고, 마지막에 남은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
외로움과 고독감이 머리끝까지 차오를 무렵, 마침 헌팅포차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거기서 만난 남자들과의 짧은 연애는 외로움의 빈자리를 그럭저럭 메워 주었다.
그러던 중 자주 가는 헌팅포차에서 서빙을 하던 알바생과 사귀게 되었다. 외모도 말솜씨도 어디 하나 빠질 데 없는 그 남자에게 B는 흠뻑 빠졌다.
당시 B는 이력서만 보고 학력은 따로 검증하지 않는 단순 서비스직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일은 고됐지만 혼자 살기에는 나쁘지 않은 월급이 나왔다.
사귄 직후부터 남자친구는 B의 집에 자주 머물렀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는 거의 살다시피 했다.
신혼 같던 두 사람 사이에 첫 균열이 간 것은 두 달이 못 되었을 때였다. 남자친구가 주기적으로 마약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B는 그 사실을 알고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가 그를 고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렇게 본격적인 헌신이 시작되었다. 마약을 끊겠다고 약속한 남자친구는 다니던 헌팅포차도 그만두었고, 생활비는 오롯이 B의 몫이 되었다. B는 낮에는 직장에서, 밤에는 서빙 알바로 두 사람 몫의 생활을 떠받치며 그의 재활을 도왔다.
그러다 사귄 지 석 달이 조금 넘었을 때, 남자친구가 체포되었다. 죄명은 단순 투약이 아니라 유통이었다.
그래도 B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수감된 동안 영치금을 보내고 일주일에 한 번씩 면회를 갔다. 출소하면 곧바로 결혼하기로 약속도 했다. 그렇게 B의 헌신은 끝이 보이는 듯했다.
남자친구가 출소했다. 당장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던 그는 한 달쯤 집에서 지내다 다시 헌팅포차 알바를 시작했다.
둘이 함께 살면서 그는 가끔 B에게 작은 심부름을 부탁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기에 B는 흔쾌히 들어주었고, 두 사람은 다시 신혼처럼 지냈다.
그가 출소한 지 6개월쯤 흐른 어느 날, 이번에는 B가 마약 유통 혐의로 체포되었다. 남자친구가 부탁했던 그 심부름이, 마약을 전달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B는 마약을 투약한 사실이 없고, 유통 역시 마약인 줄 인지하지 못한 점이 참작되어 집행유예를 받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B는 알게 되었다. 남자친구에게는 자기 말고도 다른 여자친구가 셋이나 더 있었다는 사실을. 말 그대로 B는 '넷플릭스'였다.
요금은 B가 내고, 아이디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는. 비유는 가벼웠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사실은 가볍지 않았다.
사랑이라 믿었던 관계는 한 사람의 헌신을 여럿이 나눠 쓰는 구조였고, 그 누구도 B의 삶을 책임지지 않았다.
다른 여자친구들 역시 마약 유통 혐의로 구속된 상태였다. 게다가 남자친구의 휴대전화에서는 B를 포함한 여러 여성의 사진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그 범죄에 함께 엮인 여자친구들이 모두 B처럼 정서적으로 취약한 여성들이었다는 점이다.
B는 인생에서 집행유예를 받기 전, 구속되어 있던 그 시간이 가장 끔찍했다고 말한다.
구속된 것 자체도 억울했고, 다른 여자친구들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분했다.
혹시 자기 영상이 어딘가에서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 속에서 매일을 견뎌야 했다.
지금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때는 무수히 다른 선택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리고 B는 남자친구가 부탁한 그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렴풋이 눈치를 채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렇게 간곡히 부탁하는 남자친구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고 했다. 사랑이라면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분명 아름답다.
누군가의 안부가 내 하루의 무게가 되고, 누군가의 웃음이 내 하루의 빛이 되는 일. 그래서 우리는 사랑 앞에서 조금쯤 어리석어지고, 조금쯤 너그러워지고, 또 조금쯤 용감해진다.
사랑이 사람을 자라게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사랑은 결코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기 여권을 빼앗길 만큼, 자기 이름을 잃을 만큼, 자기 삶을 통째로 저당 잡힐 만큼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빌려 입은 다른 무엇이다. 진짜 사랑은 상대를 깎아내려 자기 자리를 만들지 않으며, 상대의 두려움을 발판 삼아 무엇을 시키지 않는다.
진짜 사랑은 "거절해도 괜찮아"라고 말해 주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다.
자기 욕구를 안전하게 말해 본 경험, 싫다고 말한 뒤에도 관계가 부서지지 않은 경험, 거절했음에도 여전히 사랑받은 경험. 그 작은 경험들이 모여 한 사람의 단단한 경계선이 되고, 그 경계선이 바로 그를 살게 한다.
사랑은 위대하다.
그러나 더 위대한 것은, 그 사랑 안에서도 끝내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는 일과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은,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는 두 개의 이름이다.
부디 우리 청년들이 그 사실을 너무 늦지 않게 알아차리기를. 사랑한다는 말 앞에서 자신을 통째로 내어 주는 대신, 사랑한다는 말 안에서 자신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그것이 우리가 그들에게 끝내 가르쳐 주어야 할, 가장 마지막이자 가장 처음인 자립의 기술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고린도전서 13장 4-7절
*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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