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회장’ 정주영 탄생 100년 기획 시리즈-2

이정윤 기자 발행일 2015-11-28 15:04:12 댓글 0
정부 발주 공사와 해외 진출…현대건설의 ‘무한질주’

고향을 떠나 아버지가 소 팔아 번 돈을 몰래 가지고 도망 나왔지만 수십년이 지나 이자를 붙여 소떼 1001마리를 몰고 북한을 방문한 세기의 이벤트를 보여줬던 고 정주영 회장. 부정적 의견을 가진 직원들에게 항상 “해보기나 했어?”라며 핀잔을 주던 그는 성실성, 근면성, 끈기, 확신 등으로 이미 우리나라 산업시대의 대표적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정주영 탄생 100년, 한국경제의 초석을 다진 ‘왕회장’ 정주영의 불꽃같았던 삶을 재조명해본다.


자동차·건설업의 시작 ‘현대의 태동’


막일과, 쌀가게 일 등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정주영은 일생을 걸 만한 사업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돈도 배경도 거의 없었던 젊은 청년이 일생을 걸 만한 일은 그리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주영이 일하던 쌀가게의 단골손님이 서울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 공장의 직공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아현동에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이 있는데, 그걸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시를 받았고, 정주영은 이곳저곳 빚을 내 ‘아도서비스’를 계약했다. 오늘날 현대자동차를 세우는 초석이었다.


자동차 수리라고는 전혀 모르던 정주영은 직공들을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악착같이 배웠고, 일감도 계속해서 밀려들어 대박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자동차 공장에 화재가 발생해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갚아야 할 빚이 산더미였지만 신설동에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세운 정주영은 다른 공장보다 수리기간을 단축시키는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 다른 곳보다 수리가 빠르다는 소문이 곧장 퍼졌고, 공장에 고장난 차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아도서비스 공장은 밀려드는 일감으로 바쁘게 돌아가며 돈도 꽤 많이 벌어들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942년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 하자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동분서주한 정주영은 운수업에도 잠시 눈을 돌렸지만 실패하고 만다.


해방 직후 정주영은 1946년 4월 자동차 수리 공장을 다시 시작했다. 이때 내건 간판이 ‘현대자동차공업사’였는데 ‘현대’를 지향해서 발전된 미래를 살아보자는 의도에서였다고.


1947년 정주영은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 내부에 ‘현대토건사’를 세워 건설업도 시작했다.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시작한 건설업이었지만 정주영의 생각은 달랐고, 1950년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 사옥을 필동으로 옮겨 현대건설주식회사로 새 출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반년 후 6·25동란이 터졌고 또다시 아수라장이 됐다. 전쟁의 와중에 회사는 소용이 없었고, 정주영과 그의 가족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하지만 현대그룹의 토대가 된 현대건설은 6·25 이후 복구 사업을 통해 큰돈을 벌게 된다. 1954년부터 미국 원조 자금을 재원으로 전쟁 복구공사가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했고, 막대한 적자가 발생하긴 했지만 이를 감수하면서 고령교 공사를 마무리 지어 준 성과로 신용도 쌓아 그 후 정부 발주 공사 수주를 쉽게 할 수 있는 결과가 주어졌다.


현대건설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 바로 한강 인도교 공사를 수주하고부터인 것으로 전해진다.


획기적인 고속도로 사업


▲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됐다.사진(최초의 해외공사 태국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공사) : 1965년 태국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공사’를 현대건설이 수주한 것은, 비록 적자를 보긴 했지만 우리나라 건설업 사상 획기적인 전기로 받아들여진다.

현대건설을 주축으로 우리나라 건설 현장에서 입지를 굳힌 정주영은 해외 진출을 생각하게 되었고, 1965년 태국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공사’를 현대건설이 수주한 것은, 비록 적자를 보긴 했지만 우리나라 건설업 사상 획기적인 전기로 받아들여진다.


1966년 현대건설은 월남전이 한창이던 캄란만 군사기지 건설 공사에 참여, 태국 고속도로 공사 경험을 바탕으로 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총탄이 오가던 전쟁지역에서 현대건설은 1년 만에 공사를 마무리 지었고, 월남에서의 준설 공사 경험은 1970년대 중반 현대가 중동으로 진출해서 대규모 준설업자로 성장, 발전하게 한 초석이 되었다.


1967년 정부가 소양강의 상류를 막아 대규모의 댐을 건설하기로 하고 입찰에 부쳤고, 현대건설이 낙찰됐지만, 이도 쉽지 않았다. 댐 건설 현장인 오지까지 콘크리트를 운반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정주영은 주변에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흙과 모래, 자갈을 이용해서 사력(砂礫) 댐으로 만드는 것이 콘크리트 중력 댐보다 훨씬 경제적이라 생각해 곧바로 설계를 바꿨다. 당시 수많은 이들에게 무모하다는 핍박까지 들으며 ‘사력댐은 실패할 것’이라 지적받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북한의 폭격이 콘크리트 댐을 깨트린다면 무너지지만 홍수에만 잘 대처하면 사력 댐이 더 유리하다”는 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결국 소양강 다목적 댐은 정주영이 제시한 대안으로 바뀌어 30% 가까운 예산을 절감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는다.


또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공사였다. 정주영은 이 고속도로 건설의 초창기부터 중요한 역할로 참여를 했다.


현대건설은 서울에서 오산까지의 105킬로미터, 대전에서 옥천까지의 28킬로미터를 합쳐 전 구간의 5분의 2만을 담당했지만, 경부고속도로 전체가 완공되기까지 그의 정성과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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