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시대 도래로 친구는 경쟁자가 되고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각박한 세상에서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초인종 의인’이 주는 울림이 크다. 생전에도 그는 “위급한 상황에서는 너만이라도 먼저 살라”는 부모의 말에 “그렇게 살면 안 돼”라 답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전복된 차량 속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2차 폭팔 위험에도 불구하고 차분히 구조한 사람, 모르는 사람이지만 구급차가 빨리 지나갈 수 있도록 고생을 자처한 사람도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 살만한 세상”이란 말이 나오는 배경에는 이런 사람들의 선행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
지난 9월9일 오전 4시 20분쯤 서울 마포구에 있는 5층짜리 건물에서 불이 났다. 가장 먼저 건물을 빠져나온 것은 고(故) 안치범씨다. 그러나 그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다시 건물로 들어갔고, 결국 유독 가스에 질식해 9월20일 오전 숨졌다.
안씨는 가장 먼저 건물에서 빠져나와 119에 신고를 했지만 건물로 다시 들어갔다. 화재 사실을 모른 채 잠든 이웃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안씨의 희생 덕분에 원룸 21개가 있는 이 건물에서 다른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안씨는 건물 5층 옥상 입구 부근에서 유독 가스에 질식해 11일 만에 숨졌다.
안씨의 이러한 선행은 뒤늦게 알려졌다. 건물 내부에 폐쇄회로TV (CCTV)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경찰 조사 과정에서 안씨가 목숨을 걸고 이웃들을 대피시켰다는 증거가 속속 나왔다. 안씨의 이웃들은 경찰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 나올 수 있었다”, “젊은 남성이 문을 두드리며 ‘나오세요’라고 외쳐 탈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건물 외부에 설치된 CCTV에는 안씨가 건물로 들어간 뒤 주민 4명과 함께 나왔다가 다시 혼자서 건물로 뛰어들어가는 모습이 찍혔다.
안씨의 선행이 알려진 후 치러진 장례식장에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시민들이 많이 찾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안씨 덕분에 목숨을 건진 원룸 건물 이웃들도 조문을 와서 “아드님 덕분에 살았다.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여야 정치권은 이날 안씨를 추모하는 성명을 내고 안씨의 의사자 지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안씨의 의로운 일이 여러 사람들 사이로 퍼지면서 그가 살아생전 꿈꿨던 성우라는 꿈도 이루게 됐다.
한국성우협회에서 안치범씨를 고인의 영결식이 거행되는 날(9월22일) 고인을 한국성우협회 명예회원으로 인증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 성우 지망생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누구보다도 값지게 쓴 고인의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성우들 모두의 뜻을 모은 것이다.
이에 따라 성우협회에선 올해 말에 열리는 2016 KBS 성우연기대상 시상식 현장에서 안치범 씨의 어머니께 한국성우협회 명예회원임을 인증하는 ‘명예 성우’ 패를 전달할 예정이다.
이근욱 성우협회장은 “안치범 씨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고인의 부모님과 사람들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며 고 안치범 씨의 고귀한 목소리를 영원히 기리겠다는 뜻을 밝혔다.
의인 외면하는 사회
앞서 안치범씨의 소식에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인들의 그의 빈소를 방문해 조문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의사자’로 지정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지만 최근 4년 동안 의사상자 관련 예산은 단계적으로 줄여온 것으로 나타났다. 안씨와 같은 의인들이 의사자로 지정돼 예우와 보상을 받도록 하는 문이 점점 좁아지고 있던 것.
최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박성중(서울 서초을) 새누리당 의원이 정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의사상자 관련 예산은 2011년 53억 3200만원에서 지난해 31억 5000만원으로 40.9% 감소했다.
예산 집행액도 41억 200만원에서 26억 1400만원으로 36.2% 줄어들었다. 다만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2014년엔 집행액(39억 3200만원)이 예산액(31억 5000만원)을 초과했다.
같은 기간 의사상자로 지정된 사람도 37명에서 21명으로 점차 줄어들었다. 특히 지난해엔 재신청, 이의신청 제도가 생겨 72건의 신청이 있었지만 의사상자로 인정받은 인원은 29.1%에 그쳤다.
박 의원은 “우리 사회 곳곳에 ‘착한 사마리아인’이 많지만 정부의 홍보 부족으로 의사상자 지원 제도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관련 예산을 더욱 확보하고 홍보를 강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11인의 용감한 환경아재들
부산 곰내터널에서 발생한 유치원 버스 전복 사고의 와중에 유치원생 21명을 구조한 ‘아저씨 영웅들’ 11명에게 부산경찰청이 감사장을 수여했다.
앞서 9월2일 오전 11시께 부산 기장군 정관읍 곰내터널 안을 지나던 유치원 버스가 벽을 들이받고 오른쪽으로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버스를 뒤따르던 다른 차주들은 저마다 망치와 골프채를 들고 전복된 버스 유리창을 깨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창을 통해 유치원생 21명과 교사, 운전사를 차례로 구조했다.
이들은 어두운 터널 안에서 사고가 났기 때문에 뒤따라오는 차량에 의한 2차 사고 우려가 있었지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차량용 블랙박스에 찍힌 이 영상에 네티즌들은 ‘의로운 11명의 아재’라며 이들의 선행을 칭찬했다.
부산경찰청이 수소문 끝에 찾은 11명의 아재는 출신지도 연령대도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사고 직후 자신의 차에서 꺼내온 망치로 버스 뒷유리를 깼던 김호신(63)씨는 “넘어진 버스의 유리를 발로 찼지만 깨지지 않아 망치를 가져왔다”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사고 버스 안으로 들어갔던 시민은 회사원 신황수(50)씨였다. 신씨는 “아이들이 안전띠에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며 “아이들의 상태를 봐야겠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구조에 나섰다”고 전했다. 그는 “크게 다친 아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안심하고 뒤에서부터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근처에 있던 다른 아저씨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서서 도왔다”며 당시상황을 전했다.
11명의 시민 영웅들은 “누구라도 사고 모습을 봤으면 우리와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라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시민 영웅’이란 말은 부끄럽다”고 말했다.
노란헬멧의 ‘잔다르크’
현직 소방관의 아내가 응급 환자를 태운 구급차의 길을 터준 사연이 공개돼 네티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지난 9월6일 오후 5시 울산 중부소방서 유곡119안전센터 구급대는 울산시 중구 장현동에서 남구의 한 병원으로 산모를 이송하는 중이었다.
구급차에 탄 28주차 산모는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등 위급한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구급대는 어떻게든 한시라도 빨리 병원에 도착해야 했다. 하지만 퇴근시간이었던 신삼호교 위에서는 싸이렌을 울려도 차량 정체로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때 구급차 앞으로 노란 헬멧을 쓴 한 오토바이 운전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오토바이 운전자는 구급차 앞에 있던 차량 하나하나 창문과 트렁크 부분을 두들겨가며 운전자들에게 긴급 상황이니 길을 양보해 줄 것을 큰 소리로 알렸다.
오토바이의 동분서주한 움직임에 긴급 상황을 인지한 차량 운전자들이 협조해 길을 터주었고, 구급차는 무사히 산모를 병원까지 이송했다. 큰 도움을 준 운전자가 고마웠던 구급대원들은 사무실로 돌아와 블랙박스 영상을 다시 확인했다.
알고 보니 오토바이 운전자는 유곡119안전센터에서 함께 근무하다 다른 곳으로 옮긴 이재현 소방교의 부인 최의정 씨 였다. 유제품 배달일을 하는 최 씨는 다음날 업무 준비차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던 중이었다. 마침 정체된 도로에서 꼼짝 못하고 있는 구급차를 발견하고 용기를 내서 차량들의 길 양보를 유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최씨는 “신랑이 소방관으로 근무하다 보니 싸이렌이 울리면 급한 상황이라는 걸 평소 알고 있다. 저 때 남편 생각도 나고 빨리 도와드려야겠다 싶어서 (행동에 나섰다.) 싸이렌 울리고 급하니까 차들이 조금만 비켜줘서 빨리 병원에 구급차가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 밖에 안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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