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와 믿음은 다르다. 지지는 정책과 성과를 기준으로 선택하고, 그 기준이 달라지면 언제든 철회할 수 있다. 반면 믿음은 사실과 근거보다 충성에 무게를 둔다. 잘못이 드러나도 인정하기보다 부정하고, 비판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강화한다.
최근 한국 정치를 바라보면 '지지자'보다 '신자'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장면이 적지 않다. 특정 정치인이 논란에 휩싸여도 잘못 자체를 부정하거나, 문제를 제기한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는 모습이 반복된다.
정치적 비판이 정책 검증이 아니라 진영 공격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민주주의의 토대인 토론은 설 자리를 잃는다.
양극화의 숫자가 보여주는 현실
이 같은 현상은 단순한 체감만은 아니다.
한 시장조사기관이 2025년 초 발표한 보고서에서는 응답자의 66%가 우리 사회에 팬덤 정치가 존재한다고 답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통합 실태 진단에서도 진보와 보수 간 갈등은 4점 만점에 3.52점으로 가장 심각한 사회 갈등으로 조사됐다.
또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7%가 정치적 양극화가 이전보다 심해졌다고 답했다. 흥미로운 점은 양극화가 심각하다는 데에는 대부분 동의하면서도,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반대편을 지목했다는 것이다.
결국 모두가 갈등을 걱정하지만, 정작 자신이 속한 진영은 문제의 원인으로 보지 않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이런 인식은 상대를 설득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알고리즘이 만든 진영의 벽
디지털 플랫폼의 발달은 정치 참여의 문턱을 크게 낮췄다. 누구나 유튜브와 SNS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민주주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다.
그러나 동시에 플랫폼의 추천 알고리즘은 이용자가 보고 싶은 정보만 반복적으로 노출시키는 '필터 버블(Filter Bubble)'과 '에코체임버(Echo Chamber)' 현상을 강화했다.
비슷한 의견만 접하다 보면 자신의 생각이 절대다수라고 착각하기 쉽다. 반대 의견은 틀린 의견이 아니라 악의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결국 정치적 토론은 사라지고 감정적 대립만 남는다.
팬덤 정치가 온라인에서 빠르게 확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확성기가 된 미디어, 표적이 된 이견
과거에는 정치적 의견을 낼 수 있는 통로가 제한적이었다. 지금은 누구나 방송국을 만들 수 있는 시대다.
유튜브와 SNS는 시민 참여를 확대했지만 동시에 조직적인 여론전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특정 기사나 게시물에 집단적으로 몰려가 댓글을 작성하는 '좌표찍기', 같은 진영 정치인에게 문자폭탄을 보내거나 전화 항의를 조직하는 행태는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다.
실제로 이러한 집단행동은 이미 2017년 정당 경선 과정에서도 나타났고 이후 거의 모든 진영에서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정치인 역시 이런 압박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소수의 열성 지지층은 즉각적으로 문자와 댓글, 게시판을 통해 반응하지만 침묵하는 다수는 아무 말 없이 다음 선거에서만 평가한다.
정치인 입장에서는 눈앞의 항의가 훨씬 큰 정치적 비용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언론 환경 역시 이러한 구조를 강화한다.
협치와 타협은 조회수를 만들기 어렵지만, 충돌과 막말은 빠르게 확산된다. 국회에서 정책을 조율하는 장면보다 고성과 몸싸움이 더 많이 보도되는 이유다.
결국 정치인들도 조용히 성과를 만드는 것보다 강한 언어로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유혹에 빠지기 쉬워진다.
민주주의를 흔드는 팬덤의 역설
팬덤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대표성이 왜곡된다는 점이다.
조직된 소수는 매우 크게 보이고, 침묵하는 다수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된다.
정당은 점점 중도층을 설득하기보다 기존 지지층을 관리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정책 경쟁보다 충성 경쟁이 우선되고, 능력보다 진영 논리가 인사를 결정하는 일도 늘어난다.
결국 정치는 국민 전체를 위한 경쟁이 아니라 자기 진영만을 위한 경쟁으로 축소된다.
민주주의는 원래 다양한 의견이 충돌하고 타협하는 제도다. 하지만 팬덤 정치에서는 타협 자체가 배신으로 해석된다.
정책 수정은 원칙 없는 변신이 되고, 협치는 투항이 되며, 상대와 대화하는 정치인은 내부에서 먼저 공격받는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정치인의 책임 정치도 기대하기 어렵다. 정책 실패보다 지지층 관리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 정치의 방향은 국민이 아니라 팬덤을 향하게 된다.
믿음이 된 정치
팬덤이라는 표현이 무거운 이유는 정치가 점점 종교의 구조를 닮아가기 때문이다.
종교에서는 믿음이 의심보다 우선한다. 정치는 원래 검증과 비판을 전제로 하지만, 팬덤 정치에서는 비판보다 충성이 먼저 요구된다.
지지하는 정치인의 실수는 음모론으로 설명되고, 언론 보도는 모두 왜곡으로 치부되며,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자기 성찰이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같은 편에게도 "그 부분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유지된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가 사라질수록 정치는 스스로를 교정할 능력을 잃는다.
가장 큰 피해자는 침묵하는 시민
극단적인 정치의 가장 큰 피해자는 사실 극단적인 사람이 아니다.
조용히 정책을 비교하고, 실적을 평가하며, 상식을 기준으로 투표하려는 시민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
이들은 정치적 혐오감 때문에 점점 정치에서 멀어진다.
투표율은 낮아지고, 정치 토론에는 참여하지 않으며, 결국 가장 큰 목소리를 가진 집단만 정치권에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 다시 팬덤의 영향력은 커지고, 침묵하는 다수는 더욱 소외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민주주의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아니라 국민 모두를 위한 제도다. 그러나 정치가 팬덤 중심으로 움직일수록 조용한 시민의 의사는 점점 정책 결정 과정에서 멀어진다.
열성은 자산이지만, 맹신은 위험하다
열성적인 지지자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정당 활동을 하고, 정책을 공부하며, 정치 참여를 확대하는 일은 건강한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문제는 열성이 비판을 거부하는 맹신으로 변할 때다.
정당이 열성 지지층의 의견을 듣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만 듣기 시작하는 순간 정당은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조직이 아니라 특정 집단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으로 변질될 수 있다.
정치는 특정 인물을 위한 충성 경쟁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정책 경쟁이어야 한다.
정치인은 비판받을 수 있어야 하고, 지지자는 잘한 것은 칭찬하고 잘못한 것은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비판을 배신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정치는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 순간 정치는 설득보다 신앙을, 토론보다 충성을, 책임보다 맹목적 믿음을 요구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서로 같은 생각을 하는 사회가 아니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화하고 타협하며 더 나은 결론을 만들어가는 제도다. 정치가 종교가 되는 것을 막는 마지막 안전장치는 정치인도, 정당도 아닌 시민의 비판적 사고와 균형감각이다.
*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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