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스쿠프에서 티뷰론, 투스카니를 거쳐 N 브랜드까지… 한 시대의 드림카가 남긴 자동차 문화의 유산
1996년 4월, 현대자동차는 티뷰론(Tiburon)을 세상에 내놓았다. 달력으로는 어느덧 출시 30주년도 몇 달이 지났다. 하지만 티뷰론은 기념일 하루로 소비하기에는 아쉬운 자동차다. 오히려 30년이라는 시간은 이 자동차가 우리 자동차 산업과 자동차 문화에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티뷰론은 단순한 쿠페 한 대가 아니었다. 우리 자동차 산업이 '실용'에서 '감성'으로, '이동수단'에서 '꿈'으로 한 걸음 내디뎠던 전환점이었다.그 이전에도 현대차에는 스쿠프가 있었다. 그러나 스쿠프가 스포츠 쿠페 시장의 가능성을 시험했던 모델이었다면, 티뷰론은 현대자동차가 본격적으로 스포츠성을 담아낸 첫 독자 개발 모델이었다. 당시 현대차가 가진 기술력과 디자인 역량을 집약했고, 국산차도 운전의 즐거움과 디자인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장에 보여준 상징적인 자동차였다.오늘날 현대자동차는 아이오닉5N과 아반떼N 등 세계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인정받는 고성능 모델을 앞세워 'N 브랜드'를 하나의 글로벌 퍼포먼스 브랜드로 키워냈다. 하지만 그 출발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티뷰론이라는 이름을 빼놓기는 어렵다. 지금의 스포츠 DNA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1990년대 중반 자동차 시장을 떠올려 보면 티뷰론의 존재감은 더욱 특별했다.지금처럼 고성능 자동차가 흔하지 않았고, 해외 스포츠카는 현실과 거리가 먼 동경의 대상이었다. 국산차 시장 역시 실용성과 경제성이 우선이었다. 그런 시절 티뷰론은 조금 다른 꿈을 제시했다.'열심히 사회생활을 하면 언젠가는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스포츠 쿠페.'그래서 티뷰론은 단순히 성능과 디자인으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동차를 처음으로 '갖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 차였다.필자 역시 그 세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첫 차는 스쿠프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티뷰론을 거쳐 투스카니까지 현대차 스포츠 쿠페와 함께 청춘의 시간을 보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단순히 자동차를 바꾼 것이 아니라, 현대자동차가 스포츠 쿠페를 발전시켜 가는 과정을 함께 경험한 시간이기도 했다.나홀로, 친구들과 드라이브를 떠나던 시간은 대부분 그 자동차들과 함께였다. 낮은 차체에 몸을 싣고 운전대를 잡는 순간의 설렘, 백미러 너머로 스쳐 지나가던 계절의 풍경, 밤공기를 가르며 달리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성능도, 편의사양도 평범한 자동차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했고, 충분히 행복했다.이후 사회생활이 길어지고 가족이 생기면서 자동차를 바라보는 기준도 조금씩 달라졌다. 자연스럽게 쿠페에서 세단으로 옮겨갔다. 속도보다 편안함을, 디자인보다 실용성을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이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가장 자주 떠오르는 자동차는 최신 세단이 아니라 티뷰론이다. 아마 자동차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동차와 함께했던 가장 빛나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아마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자동차는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다. 시대를 담고, 세대를 기억하게 만드는 문화이기도 하다.티뷰론은 국내 자동차 문화에도 적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스포츠 쿠페에 대한 관심을 키웠고, 자동차 동호회와 튜닝 문화가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동차를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닌 성능과 디자인, 개성으로 이야기하는 문화가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흥미로운 것은 당시 현대자동차 내부 자료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1996년 현대차 사보 '판매뉴스'에는 티뷰론을 둘러싼 현장의 열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 소개된 현대차 영업사원은 실차를 앞세운 현장 판촉만으로도 고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회고한다. 백화점과 공원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티뷰론을 전시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차량을 둘러보며 질문을 쏟아냈다. "티뷰론 정말 멋진 차입니다"라는 고객들의 반응은 단순한 판매 실적 이상의 의미를 보여준다. 티뷰론은 당시 현대차의 얼굴이었고, 브랜드 이미지를 한 단계 끌어올린 상징적인 모델이었다. 30년이 흐른 지금 자동차 산업은 완전히 달라졌다. 전동화가 시대의 흐름이 됐고, SUV가 시장의 중심이 됐으며, 성능 경쟁의 기준도 크게 바뀌었다. 그럼에도 현대차가 최근 티뷰론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브랜드에는 헤리티지가 필요하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자산이기 때문이다.다만 아쉬움도 있다. 현대차는 국내 완성차 업체 가운데 비교적 헤리티지 프로젝트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 왔지만, 의미 있는 모델들이 기념일을 지나 뒤늦게 조명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티뷰론 역시 출시 30주년을 맞아 보다 체계적이고 대중적인 전시나 고객 참여 행사, 오너들과 함께하는 기념 프로젝트 등이 마련됐다면 브랜드 역사와 우리 자동차 문화 모두에 더욱 의미 있는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자동차는 시간이 지나면 단종된다. 그러나 모든 자동차가 역사로 남는 것은 아니다.티뷰론은 판매량만으로 평가할 차가 아니다. 현대자동차가 처음으로 '실용'을 넘어 '열망'을 이야기했던 모델이었고,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자동차를 꿈꾸게 만든 이름이었다.어쩌면 티뷰론은 현대자동차 최초의 스포츠 쿠페가 아니라, 현대자동차가 처음으로 '꿈'을 팔기 시작한 자동차였는지도 모른다.정민오 기자 daily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