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는 일본 제국이 조선의 국권을 빼앗고 민족의 삶과 문화를 억압한 폭력의 시대였다. 그 책임은 어떤 미담으로도 흐려질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시대, 식민 지배의 부당함을 외면하지 않고 조선의 사람과 문화 곁에 서려 했던 일본인들도 있었다.
누군가는 조선의 산에 나무를 심었고, 누군가는 이름 없는 장인의 그릇을 지켰다. 누군가는 독립운동가의 변호인이 됐으며, 또 다른 이는 부모 잃은 아이들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제국의 국민으로 태어났지만, 적어도 삶의 어느 자리에서는 제국이 명령한 침묵을 거부했다.
조선의 곁에 섰던 다섯 사람
이번에 살펴볼 인물은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다.
이들을 모두 같은 성격의 인물로 묶을 수는 없다. 후세 다쓰지가 식민지 민중과 독립운동가를 법정에서 변호한 인권변호사였다면, 아사카와 형제와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도자기와 생활 공예를 연구하고 보존한 사람들이었다. 소다 가이치는 버려진 아이들을 돌본 사회사업가이자 기독교인이었다.
활동 영역도, 조선을 바라본 관점도 달랐다. 특히 야나기의 조선 예술론은 오늘날까지 식민주의적 시선과 연결해 비판받는다. 따라서 이들을 무조건 ‘조선을 사랑한 의인’으로만 그리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한다.
다만 식민 지배가 일상이던 시절, 조선의 사람과 문화가 사라지지 않도록 행동했다는 사실만큼은 기록 속에 남아 있다.
1. 조선의 산과 생활 공예를 사랑한 아사카와 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는 1891년 일본 야마나시현에서 태어났다. 농림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4년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총독부 산림과와 임업시험장에서 근무했다.
그는 관청의 일본인 기술자였지만 조선의 산림을 일본식 기준으로만 다루지 않았다. 조선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나무를 찾고, 자연의 질서에 가까운 조림 방식을 고민했다. 1924년에는 잣나무 종자의 발아를 촉진하는 노천매장법을 개발해 훼손된 산림을 복구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시선은 산에서 조선 사람들의 밥상과 부엌으로 옮겨갔다. 당시에는 흔하고 보잘것없는 물건으로 취급됐던 소반과 장독, 목공예품과 백자에서 이름 없는 장인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 결과물이 1929년 출간된 『조선의 소반』이다. 사후에는 『조선도자명고』가 간행됐다. 다쿠미는 물건의 형태만 기록하지 않았다. 지역마다 달랐던 명칭과 쓰임, 제작 방법을 조사하며 생활 속에 스며든 조선인의 미감을 남겼다.
그는 야나기 무네요시, 형 노리타카와 함께 1924년 경복궁 집경당에 문을 연 조선민족미술관의 설립과 운영에도 참여했다. 미술관은 왕실의 화려한 유물보다 민중이 일상에서 사용했던 공예품에 주목했다. 다쿠미는 그 실질적인 운영을 맡았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 기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31년, 그는 급성폐렴으로 불과 마흔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다쿠미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늘날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잠들었다. 그의 묘비에는 조선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이 이곳에서 한국의 흙이 됐다는 뜻의 글이 새겨졌다.
2. 조선 도자기의 시간을 기록한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의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조선 도자기를 체계적으로 조사한 연구자였다.
그는 1913년 경성의 학교에 미술교사로 부임한 뒤 조선 백자의 담백한 빛과 형태에 매료됐다. 이후 전국 수백 곳의 가마터를 찾아다니며 도자기 조각을 수집하고, 제작 시기와 지역적 특징을 조사했다.
그가 한 일은 아름다운 도자기를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흩어진 파편을 통해 조선 도자기의 계보와 변화를 복원하려 했다. 오늘날에는 작고 불완전해 보이는 파편 하나도 도자사의 연대와 제작지를 밝히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노리타카는 동생이 세상을 떠난 뒤 조선민족미술관의 운영을 이어받았다. 광복 이후에는 자신이 수집한 공예품 약 3천 점과 도자기 조각 서른 상자를 한국에 기증했다. 이 자료들은 국립민족박물관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의 한 줄기가 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생 다쿠미가 조선의 숲과 생활 속 물건에 귀를 기울였다면, 형 노리타카는 땅속과 가마터에 남은 파편을 따라 조선 도자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섰다.
3. 독립운동가의 법정 곁을 지킨 후세 다쓰지
후세 다쓰지는 다섯 사람 가운데 식민 지배에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맞선 인물이다.
1879년 일본 미야기현에서 태어난 그는 변호사가 된 뒤 국가와 권력이 외면한 사람들의 편에 섰다. 1919년에는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발표한 조선인 유학생들의 변호를 맡았다.
이후 의열단원 김시현, 일본 왕궁 앞에서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일왕 암살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등 조선 독립운동 관련 인사들을 변호했다. 1926년에는 나주 궁삼면 농민들이 동양척식회사를 상대로 벌인 토지회수 투쟁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법정에서 단순히 형량을 줄이는 데 머물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인에게 가한 차별과 고문, 토지 수탈 자체를 문제 삼았다. 그 대가로 변호사 자격정지와 투옥을 거듭했다.
해방 이후에도 재일조선인의 권리 보호와 일본 평화헌법의 보급에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당시 일본인으로서는 최초의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포상이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후세의 삶을 설명하는 말은 그의 묘비명으로 전해지는 문장에 압축돼 있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하여.”
법은 권력의 문장이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손에서는 약한 사람을 지키는 마지막 문장이 될 수도 있음을 그는 보여줬다.
4. 광화문 철거에 반대하고 조선 민예를 알린 야나기 무네요시
일본 민예운동을 이끈 사상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이름 없는 장인들이 만든 백자와 목공예, 생활용품에서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는 1916년 처음 조선을 방문한 뒤 여러 차례 조선을 오가며 공예품을 수집하고 연구했다. 아사카와 형제와 함께 1924년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했고, 강연과 음악회, 저술 활동을 통해 마련한 돈을 건립 기금으로 보탰다.
특히 1922년 조선총독부가 신청사 건립을 이유로 광화문 철거를 추진하자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 건축물을 위하여」라는 글을 발표해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광화문을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한 민족의 역사와 기억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의 글은 일본과 조선 사회에 반향을 일으켰다. 동북아역사재단
그러나 야나기에 대한 평가는 찬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학술지인용색인 수록 연구에 따르면 그가 조선 미술을 ‘비애의 미’로 설명한 것은 식민지 조선을 수동적이고 슬픈 존재로 고정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조선 예술을 사랑했다는 사실과, 그 사랑 속에도 식민지 지식인의 한계와 타자화의 시선이 존재했다는 평가는 함께 살펴봐야 한다.
한 사람의 선의가 언제나 완전한 이해를 뜻하지는 않는다. 야나기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논쟁적인 이유다.
5. 부모 잃은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소다 가이치
소다 가이치는 정치가도 학자도 아니었다. 그는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이었다.
1867년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난 소다는 조선에서 YMCA 일본어 교사 등으로 일했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사회사업에 뛰어들었다. 1921년부터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의 운영을 맡아 일제강점기 거리로 내몰린 수많은 아이를 보살폈다. 이 시설의 역사는 오늘날 영락보린원으로 이어진다.
그가 평생 돌본 아이의 수는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천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들에게 그는 국적을 앞세운 일본인이 아니라 먹을 것과 잠자리를 마련하고 곁을 지켜준 어른이었다.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간 소다는 일본 각지를 다니며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책임과 회개를 촉구했다. 말년인 1961년 다시 한국을 찾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 소다 가이치의 생애를 다룬 학술연구, 연합뉴스 관련 기록
다만 “이름 모를 조선인이 타이완에서 쓰러진 소다를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해 조선에 왔다”는 유명한 일화는 그대로 단정하기 어렵다. 관련 연구는 그가 처음 조선에 온 직접적인 이유가 취업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아름다운 일화일수록 기록과 전승을 구분해 읽어야 한다.
영웅 만들기가 아니라, 선택을 기억하는 일
다섯 사람을 소개하는 목적은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 책임을 희석하거나 ‘좋은 일본인’의 이야기로 피해의 역사를 덮으려는 데 있지 않다.
아사카와 형제는 조선총독부와 식민지 교육기관에서 일했고, 야나기의 미학에는 식민주의적 시선이라는 비판이 남아 있다. 소다 가이치에 관한 일부 미담도 사료를 통해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삶에는 선의와 한계, 실천과 모순이 함께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선택할 수 없지만, 부당한 시대 앞에서 어느 쪽을 바라보고 누구의 곁에 설지는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쿠미는 조선 사람들이 사용하던 작은 밥상을 들여다봤고, 노리타카는 버려진 도자기 파편을 주웠다. 야나기는 사라질 광화문 앞에서 글을 썼고, 후세는 피고인석에 선 독립운동가의 곁을 지켰다. 소다는 거리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
거대한 역사책에는 제국과 전쟁, 조약과 통치자의 이름이 먼저 기록된다. 그러나 역사의 체온은 언제나 이름 없는 그릇과 한 그루의 나무, 법정의 변론과 아이에게 건넨 밥 한 끼 속에 남는다.
친일과 항일을 둘러싼 논쟁이 거세질수록 필요한 것은 성급한 영웅 만들기도, 불편한 사실을 지우는 단죄도 아니다.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으며, 그 행동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기록으로 차분히 살피는 일이다.
어두운 시대에도 모든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시대의 명령을 따랐고, 누군가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주 적은 사람들은 국적과 경계를 넘어 고통받는 이들의 곁에 자리를 내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의 국적보다, 침묵할 수 있었던 순간에 침묵하지 않았던 선택인지도 모른다.
[정기자의 뉴스정원]
눈 쌓인 거인의 정원을 몰래 찾은 아이들이 앉았던 나무에만 봄이 찾아와, 결국 거인이 쌓았던 벽들을 허물고 정원을 개방한다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단편 소설 "거인의 정원(The Selfish Giant)"처럼, 담장 밖 뉴스들은 잠시 지우고, '정기자의 뉴스정원'에서는 세상에 채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 같은 문화 뉴스들만 골라 시민 여러분께 개방해 드리겠습니다.
.
"정기자의 뉴스정원"은 시민들 제보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세상에 채 알려지지 않은 신간 소개, 공연 소식, 전시 등 문화 소식, 예술가나 다양한 인물들의 소식들을 정기자(jnoog@naver.com)에게 사진과 간단한 내용을 적어 제보해 주시면 됩니다.













![[정기자의 뉴스정원] “겁먹지 마, 우리의 계절은 이제 시작이니까” … 소피 데뷔 쇼케이스 ‘Don’t panic!’](/data/dlt/image/2026/09/08/dlt202609080009.230x172.0.jpg)

![[시론] 시민들에게 공휴일로 변해간 7월 17일 제헌절, 가인(街人) 김병로가 남긴 뼈아픈 질문](/data/dlt/image/2026/07/09/dlt202607090006.230x172.0.jpg)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