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공헌 대표기업 ‘유한양행’…창업자 ‘유일한’ 박사

이정윤 기자 발행일 2016-12-08 19:12:26 댓글 0
27세 아이디어 하나로 사업, 31살에 250억 원의 자산가...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 ‘노블레스 오블리주’

“기업에서 얻은 이익,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
유일한 박사의 기업 경영의 제1원칙, 투명경영·성실납세
평소 검소한 생활과 거액의 기부, 가치투자의 귀재 등으로 전세계적으로 존경을 받는 워렌버핏에게 뒤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요즘 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화두이다. 하지만 이를 40여년 전 몸소 실천하신 분이 있다.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기업활동이 사회적 기여 활동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돌아가신 유일한 박사. 유일한 박사는 그의 어록에서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숭고한 정신과 전무후무한 기업이익의 사회공헌 시스템 구축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유일한의 사회적 업적이다.


▲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

유일한 박사는 당시 최연소 조기 유학생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9세 아이를 혼자 미국으로 유학 보내기는 힘들다. 하지만 100년 전 한성(서울)도 밟아보지 못한 9살 아들을 미국이라는 멀고도 낯선 땅으로 보내는 것은 대단한 결정이었다. 그것도 집안의 장손을 말이다. 선진국에 가서 앞선 문물을 익히라는 아버지 유기연 공의 결단과 선견지명이 9살 아들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이다.
그는 또 27세에 아이디어 하나로 사업에 뛰어들어 31살에 250억 원의 자산가가 된 청년 사업가이기도 하다. 잘 나가는 대기업 제너럴 일렉트릭(GE)에 사표를 던지고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 6년 만에 2백만 불 (현재 가치로 250억원 상당) 자산의 회사로 성장시켰다. 라초이 식품회사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숙주나물 사업을 시작해, 미국 전역에 동양 식료품을 취급하는 회사로 유명해진다. 창업 6년 후에는 직원이 400명에 이르고 일년 매출이 당시 2백만원에 이르는 큰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 성공을 뒤로 하고 모든 것을 정리해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 그의 나이 31세 때 일이다.


사회사업가 ‘유일한’
9살의 나이로 홀로 미국 유학을 떠난 유일한은 31살에 미국에서 성공한 청년사업가가 되어 1926년 고국 땅을 밟는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조국의 현실은 일제 식민 치하에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비참함 그 자체였다. 이런 조국의 비참한 현실은 그로 하여금 국민 건강을 지키는 제약업을 선택하게 하였다. “건강한 국민만이 장차 교육도 받을 수 있고, 나라도 되찾을 수 있다”라는 신념은 1926년 12월 10일 제약회사 ‘유한양행’ 설립을 통해 실현된다.
유일한은 타고난 사업가로서 뛰어난 경영 감각과 혁신적 아이디어로 유한양행을 굴지의 제약회사로 키웠다. 하지만 그가 회사를 키운 목적은 개인적 부의 축척이 아닌 사회 환원이었다.
1936년 개인기업을 법인으로 바꾸는 결단도, 1962년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을 상장하며 자본과 경영을 분리한 것도, 1969년 경영 일선에서 은퇴하며 자식이 아닌 회사 임원에게 사장직을 물려줘 전문경영인 등장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도 유일한이 가진 기업 철학의 실천이다.
특히 투명경영과 성실납세는 기업 경영의 제1원칙이었다. 일제시대와 1960년대 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유한양행을 향한 세무조사의 칼날은 1원도 탈세하지 않은 사실이 알려지며, 오히려 모범납세기업으로 선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1968년 유한양행은 모범납세기업으로 선정되어 동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 유한양행의 사회 환원 시스템.>

“기업의 존립 바탕인 국가에 성실하게 납세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정치와 기업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투명한 경영을 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유한양행의 기업이미지에 또 하나의 큰 보탬을 준 셈이다.
유일한이 평생 기업가로서 펼쳐온 국익 사상, 혁신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실용주의, 낭비를 절대 허용치 않는 근검절약의 정신과 청지기 정신은 한국 사회 기업사의 보기드문 모범이 되고 있다.
유일한에게 기업활동은 그 자체가 교육사업이며, 공익사업이었다. 귀국 후부터 시작된 개인적인 장학, 공익사업은 회사가 안정기에 접어든 1953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유일한은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원을 설립하고 1960년대에는 유한중학교,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항구적인 교육장학, 사회원조사업을 위해 유한양행 주식 등 자신의 재산을 출연해 1970년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현 유한재단 및 유한학원)’을 발족하였으며 유언장을 통해 전재산을 이 기금에 기증했다.
생전에 유일한은 기업인으로서보다 교육사업가로서 더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유일한 박사가 외국 출장 시에도 ‘유한양행 회장’ 명함보다는 ‘Educator’라 씌여있는 명함을 즐겨 사용했다는 일화만 보더라도 교육에 대한 그의 애정과 태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틈만 나면 우리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기술교육을 받은 사람이 늘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현장에서 땀흘리며 일하는 진짜 기술인을 좋아했던 유일한이 기술 전문학교인 유한공고를 세운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는 학교를 세울 때부터 탁상공론을 철저히 배격했다. 일하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다는 게 그가 갖고 있는 교육관이었다. 따라서 초창기 교육과정은 그의 뜻을 받아들여 실습을 대폭 강화했다.
유일한은 생전에 시간만 있으면 학교를 찾았다고 한다. 젊은 학생들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해 했으며, 격의없이 어린 학생들을 안아 주고 어깨를 두드려 주며 격려했다고 한다. 학생들을 만나는 것도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쉬는 시간이나 운동장에서 격식 없이 잠깐씩 만났으며, 학생들에게 하는 말도 늘 같았다. “너희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우리 나라가 발전한다.” 신임교사들에게 했던 당부도 마찬가지였다. “나라를 이끌 훌륭한 인재를 키워 달라.”는 당부를 항상 잊지 않았다고 한다.
유일한은 독립운동가이다. 하지만 그를 독립운동가로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는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던 시절부터 조국 현실에 눈뜨고 14살에 조국 독립을 위한 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에 자원 입대할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했다. 1919년 24살의 대학생이던 유일한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역사적인 한인자유대회에서 한인대표로 결의문을 작성, 낭독하는 등 기최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민족기업으로 성장시킨 후, 유일한은 1938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 활동을 전개한다. 194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 집행부에 가담하였고, 이후 재미 독립운동가들과 활발한 애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42년에는 LA에서 재미 한인들로 무장한 맹호군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으며, 1945년에는 버지니아주에서 12개국 대표 160명이 모이는 IPR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전후 일본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생전 그의 침묵으로 유박사의 독립운동은 사후에야 비로소 연구가들에 의해 알려졌다. 그의 독립운동 활동 중 정점이라 할 만한 것은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임한 냅코(NAPKO) 작전이다. 유박사는 1942년부터 미육군전략처(OSS)에서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OSS의 비밀 침투작전인 냅코작전에 공작원으로 입대하게 된다. 이 작전은 한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독수리 작전과 합동 수행으로 한국인을 국내로 침투시켜 정보 수집, 폭파, 무장 유격활동 등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당시 유박사는 50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된 군사훈련과 공수훈련까지 받으며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1945년 8. 15 광복으로 냅코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나라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것을 신성한 말로 서약하여야 한다’는 자신의 말을 몸소 실천한 그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유일한 박사는 교육장학 사업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에 공헌하였다. 그 예로, 1956년부터 1968년까지 유한 사우공제회, 보건장학회, 유공관리기금 등을 설립하였고 1970년에는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을 설립함으로써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원조사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꾀하였다. 이 기관은 1977년 법률규정에 따라 ‘재단법인 유한재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현재까지 각종 공익사업을 활발하게 수행하고 있다.
유일한 박사는 기관 설립 이듬해인 1971년 타계할 당시 개인소유주식 14만941주(발행주식 수의 20.6%) 모두를 이 기관에 기부하여 현재 유한재단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71년 3월 11일 영면 시까지 유일한이 각종 공익재단에 기증한 개인주식은 유한양행 총 주식의 40%(현재가치 약8,850억원-2014년 2월 기준 시가총액 2조 2,137억원)에 달한다. 이는 그가 평생에 걸쳐 실천해 온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라는 철학의 완성작으로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숨쉬며 많은 기업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도움을 주자”라는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정신으로 1926년 설립된 유한양행.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 74 소재,)>


사회공헌 기업 ‘유한양행’



약에 마약성분을 넣는다고?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서만 머문다면 수전노와 다를 바가 없다.(유일한 박사 어록 中) 유한양행은 네오톤토닉이라는 약을 제조 판매하여 강장제 시장에 뛰어들었다. 네오톤토닉은 그야말로 강장제로서 신체 허약, 신경쇠약, 빈혈증 등 여러 쇠약증상에 효험이 있었다.
그 당시 심신 쇠약증세를 치료하여 원기를 회복시켜준다고 선전하는 약품들 중에는 마약성분이 들어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아편이나 기타 마약 성분을 약간만 섞어도 약을 본용하는 자는 금방 효과가 나는 것처럼 여겨져 좋은 약으로 오인을 하게 되고, 결국 그 약을 먹지 않으면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중독 상태로 빠지게 된다.
유한양행 직원들 중에도 약을 제조할 때 마약 성분을 조금 넣어 효과를 극대화시켜 판매를 늘리자고 제안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유일한은 단호한 태도로 그 직원을 무섭게 책망했다. “자네, 그동안 우리 회사에서 영업을 하면서 배운 것이 고작 그런 것뿐인가? 우리 회사의 생명이 무엇인가? 신용이 아닌가. 그런데 약의 효과를 빨리 내기 위해 마약 성분을 섞는다는 것은 소비자를 속이는 행위이고, 더 나아가 국민 건강을 크게 해치는 일이네. 자네, 당장 사표를 쓰게!” 직원은 회사 수익을 생각한 나머지 유일한 박사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점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간신히 사표 쓰는 것을 면했다. 소비자들은 차츰 네오톤토닉이 다른 강장제 제품들과는 그 성분부터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더욱 네오톤토닉을 믿고 선호하게 되었다.
또 유일한은 어떤 일이 있어도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정권 담당자들에게 건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을 투명하게 경영하고 무엇보다 세금을 정직하게 납부하여 세무사찰이 나와도 걸릴 게 없도록 해야만 했다. 물론 일한의 평소의 국가관과 기업관에 의하여 세금을 성실히 납부한 것이지, 단지 세무사찰을 피하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 유일한은 “불이 나면 소방서에 불을 꺼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국민의 권리라면, 소방서에서 소방차를 사는데 돈을 내는 것이 바로 국민의 납세의무이다”라고 말했다.
한번은 유한양행 회계과 직원들이 상반기에 납부할 영업세 계산을 정확하게 돈까지 다 마련해놓고는 정작 납부기한인 6월 30일은 세금 납부를 깜빡 잊고 넘어가고 말았다. 그 다음날에야 영업세 납부 누락 사실을 알고 회계과 직원이 부랴부랴 세무서로 달려갔다. 세무서에서는 하루밖에 지나지 않긴 했지만 규정상 가산세 5퍼센트를 더 내야 한다고 했다. 영업세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가산세 액수만 해도 엄청났다. 낙심한 회계과 직원들이 회사로 돌아와 이건웅 사장에게 보고했다. 이건웅은 직원들을 호되게 나무랐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뜻밖에 희소식이 날아왔다. 세무서 법인세 계장이 전화를 하여 세금 납부를 정상적인 기한에 한 것으로 해줄테니 서류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직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단숨에 세무서로 달려갔다. 법인세 계장은 이미 어제부터 유한양행을 위해 빈 칸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유한양행은 한번도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거나 납부 기일을 어긴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납부할 줄 알고 이렇게 칸을 비워두었지요.” 직원들은 일을 잘 처리하게 되어 회사로 돌아와 자랑스럽게 보고하였으나 징계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 일로 회계과장 박장원은 6월분 상여금을 받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유일한은 자신의 돈으로 박장원에게 상여금보다 더 많은 위로금을 전달하였다. 비록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 동안 회계과에서 유일한의 지침에 따라 세금을 성실하게 납부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일한은 제약회사 최초 기업공개를 했다. “기업의 제 1목표는 이윤의 추구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실한 기업활동의 대가로 얻어야 하는 것이다.”(유일한 박사 어록 中) 1962년 유일한 회장이 유한양행의 주식을 공개하겠다고 하자 회사 내에서는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기업공개를 하는 기업은 거의 없었다. 제약업계에서는 유한양행이 최초였다. 정부에서도 1974년에 가서야 비로소 대통령특별지시로 기업공개를 촉구했다. 그러니까 이때는 순전히 유일한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한 기업공개였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유한양행이 기업공개를 한다는 것은 우니나라 기업 실정으로 볼 때 시기상조였다. 당시 유한양행의 재무구조는 외부자금이 없더라도 충분히 운영이 가능한 상태였다. 따라서 임직원들은 기업공개를 보류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유 회장은 이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유일한 회장은 “우리 나라 기업이 한두 사람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져 가지고는 장족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회사가 다소 시끄러워질망정 많은 사람을 참여시켜야만 회사 발전에 도움이 되고 국가발전에도 참여하는 길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취지에서 유한양행은 주식을 공개하였고, 따라서 자본과 경영을 분리하게 된 셈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기업의 민주화를 실행하였다.
현재 유한양행은 유일한 박사의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는 명제를 사회공헌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유한양행은 기업의 이윤이 공익재단을 통해 사회로 흘러가는 사회공헌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창업정신과 전재산 사회환원이라는 실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유일한 박사는 1971년 영면하시며 전 재산을 공익재단인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에 기증했다. 그래서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유한의 최대 주주는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이 되었으며, 양 기관은 유한양행의 배당 수입으로 지속적인 사회공헌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즉 유한양행이 창출하는 이익의 상당 부분은 구조적으로 우리 사회에 환원되도록 시스템화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유한 사회공헌의 핵심이다.
현재 이정희 대표이사가 맡고 있는 유한양행은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도움을 주자”라는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이어 받아 창업 이래 지금까지 신뢰와 정직의 기업문화를 가지고 우수한 의약품 생산과 국민보건 향상에 매진해왔다. 국내 1등 제약사, 국내 대표 장수기업 등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등 사회공헌 대표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유한양행은 국민보건 향상과 직결되는 의약품뿐만 아니라 건강기능식품, 생활용품, 동물약품, 화장품 등 인류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사업에 진출하며 미래의 지속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는 연구개발을 통해 혁신적 신약개발로 글로벌 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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