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벨트,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한양 ‘금산 제도’

김정희 기자 발행일 2021-08-29 23:49:02 댓글 0

조선의 개국 초기인 14세기 말~15세기 초부터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인 한양 ‘금산 제도’가 존재했다.

조선시대 때 산림은 당시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 집의 주재료, 땔감, 농기구 등 나무가 많이 필요했다. 이에 산림을 보호하고자 조선은 국초부터 ‘금산 제도’를 실시했다.

‘금산 제도’란 도성 안팎에 일정한 구역, 즉 금산(禁山)을 정해두고 그 안에서는 농사짓기, 땔감 채취 및 경작을 금지하던 제도였다. 금산에 포함되는 범위는 조선 전기에는 도성 안과 성밖의 일부 지역, 후가에는 성 밖 십리에 이르는 지역으로 확대됐다. 이 제도는 국가의 목재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산림보호라는 목적도 분명히 있었다.


그 중에서도 소나무는 강도나 재질이 우수해 불법 벌목이 많았다. 세종 때 들어와서 금산의 소나무를 베는 자들에 대한 처벌 방침을 강구했고, 세조 때에 비로소 강력한 처벌 규정인 ‘송금 정책’이 제정됐다. 금산 밑의 거주민을 산지기로 정하고 그 지역의 관리를 따로 배치한 것이다.

형벌은 금산에서 소나무를 벤 자는 곤장 100대를 맞았고, 산지기는 80대, 관리는 40대의 태형 처벌이 내려졌다. ‘리델 주교 옥중기’에 따르면 ‘곤장 10대는 살점이 나가고 그들이 회복하기까지 한달이 걸렸다’고 언급돼 있다. 그만큼 곤장 100대는 사망률이 높은 형벌이었다.

‘송금 정책’외에도 소나무 육성에도 힘을 썼다. 관리들은 매년 심은 소나무 숫자를 중앙에 보고해야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때도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금산 제도와 송금 정책이 있었다.

‘금산 제도’는 도시의 지나친 팽창을 막고 자연을 보존하는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그린벨트제도’라 부를 수 있다.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를 줄인다거나 도성에 어울리는 주위 경관을 조성한다는 등의 목적도 있었지만, 산줄기를 따라 흐르는 땅의 기운인 지기(地氣)를 잘 모아 왕도인 한양을 명당으로 만든다는 큰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금산 내에서는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르는 것까지도 금지하며 단순한 환경 보호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금산은 개발제한구역을 넘어서 절대보존구역인 셈이다.

산림 파괴는 오늘날에도 심각한 문제다. 선조들도 보호했던 산림, 지금의 우리와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지켜야 할 필요성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사진=언플래시 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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