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 분쟁에서도 병참과 에너지 공급망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전투 장비의 성능 못지않게 연료와 탄약, 식량 등을 필요한 시점과 장소에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느냐가 작전 지속 능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19일부터 20일까지 SK이노베이션 울산Complex(울산CLX)에서 진행된 ‘민·관·군 합동 유류인수 및 분배훈련’은 단순한 정례 훈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번 훈련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해군 군수지원함이 민간 정유시설인 울산CLX 해상부두에 직접 접안해 유류를 공급받는 해상 급유훈련이 실시됐다는 점이다.
기존 육상 중심의 유류 공급체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해상까지 공급 경로를 확대해 비상 상황에서의 에너지 수송 능력을 점검했다는 것이다.
전시 상황에서는 평상시 이용하던 도로와 철도, 송유관 등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보장이 없다. 특정 수송망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체 경로를 얼마나 신속하게 가동할 수 있는지가 군수지원의 핵심이다.
이번 훈련에서는 유조차와 철도 유조화차, 유조선 등 다양한 인수·수송수단을 활용해 유류 공급 절차를 점검했다. 송유관 파손과 화재뿐 아니라 해킹 등 비상 상황도 가정해 대응 및 복구 절차를 살펴본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정유시설과 에너지 공급망이 국가경제뿐 아니라 국가안보와도 직접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정유시설은 평상시에는 산업과 교통을 움직이는 에너지 공급기지지만, 비상 상황에서는 군 작전과 국가기능 유지에 필요한 핵심 기반시설이 된다.
따라서 시설이 일부 손상되거나 물류망이 차단될 경우 얼마나 빠르게 대체 공급망을 가동할 수 있는지, 주요 공정을 얼마나 신속하게 복구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국가 안보와 에너지 안보, 이제 따로 볼 수 없다
이번 훈련이 보여준 또 하나의 특징은 민·관·군 협력이다.
현대사회에서 국가안보를 군의 역할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에너지와 통신, 전력, 물류 등 상당수 핵심 기반시설은 민간기업이 운영하고 있다.
특히 석유제품 생산과 저장, 수송 인프라를 보유한 정유업체의 경우 국가 비상 상황에서 안정적인 연료 공급을 유지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다.
정부와 군이 비상계획을 마련하더라도 실제 생산시설과 저장탱크, 부두, 송유관 등을 운영하는 민간기업과의 협력체계가 작동하지 않으면 실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 훈련은 민간 정유시설과 군수지원체계를 실제로 연결해 유류 인수와 분배 절차를 점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훈련의 성과를 한 차례의 행사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실제 위기 상황에서는 시설 파손과 통신 장애, 사이버공격, 전력 공급 중단 등이 동시에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단순한 유류 수송뿐 아니라 생산과 저장, 운송, 통신, 사이버 보안까지 포함한 복합적인 대응체계를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얼마나 공급할 수 있나’보다 ‘얼마나 버틸 수 있나’
에너지 안보에서 중요한 것은 평상시 공급능력만이 아니다.
비상 상황에서 기존 공급망이 흔들렸을 때 얼마나 오랫동안 국가 기능과 군 작전을 유지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이를 위해서는 유류 비축과 대체 수송망, 시설 복구 능력, 민간사업자와의 협력체계를 동시에 갖춰야 한다.
특히 특정 지역이나 특정 시설에 공급기능이 과도하게 집중돼 있다면 위기 발생 시 전체 공급망에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육상과 해상, 철도 등 수송방식을 다변화하고 여러 지역의 저장·생산시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이번 울산CLX 훈련은 이런 측면에서 평상시 존재하던 민간 에너지 인프라가 비상 상황에서는 어떻게 국가 안보 자산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훈련은 ‘완료’가 아니라 취약점을 찾는 과정이어야
훈련의 목적은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미리 찾아내고 보완하는 것이 훈련의 본래 목적이다.
군수지원함의 접안과 급유 과정에서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육상 수송망이 마비될 경우 해상수송이 어느 정도를 대체할 수 있는지, 사이버공격으로 시스템 일부가 중단되면 수동 운영이 가능한지 등 구체적인 취약점을 확인해야 한다.
훈련 결과를 토대로 대응 매뉴얼을 수정하고 반복적인 실전형 훈련을 실시해야 비로소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사이버 위협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가능성이 크다. 정유시설 상당 부분이 자동화·디지털화돼 있는 만큼 물리적 시설 방호뿐 아니라 생산·저장·출하 시스템을 보호하는 사이버 보안 능력도 에너지 안보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에너지 동맥이 멈추면 국가 기능도 흔들린다
이번 훈련은 우리 사회가 에너지 문제를 단순한 산업이나 가격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시 보여준다.
평상시 주유소에서 쉽게 공급받는 휘발유와 경유도 비상 상황에서는 국가의 작전능력과 산업 활동, 물류망을 유지하는 전략물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에너지 안보는 곧 국가안보다.
SK이노베이션과 같은 민간 정유기업이 국가 비상계획 속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군과 정부가 이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이번 합동훈련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한 번의 해상 급유훈련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육상 공급망이 막혔을 때 실제로 바닷길을 활용할 수 있는지 확인했다는 점이고, 민간기업과 군이 평상시부터 실제 절차를 맞춰봤다는 점이다.
앞으로의 과제는 명확하다. 훈련에서 확인된 문제점을 공개 가능한 범위에서 분석하고, 수송망 다변화와 비축체계, 사이버 보안, 시설 복구 능력을 지속적으로 보완해야 한다.
현대전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최첨단 무기의 숫자만이 아니다. 그 무기가 마지막 순간까지 움직일 수 있도록 연료를 공급하는 보이지 않는 군수체계가 버텨줘야 한다.
에너지 공급망이 살아 있어야 국가의 방어력도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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