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잠시 멈춘 자리에서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두 손이 움직이면 안부가 오가고, 눈과 눈이 마주치면 웃음과 위로가 흐른다. 오는 19일 서울 신촌 연세로가 이처럼 ‘보이는 언어’로 가득 찬 거리로 변한다.
제21회 서울특별시 수어문화제 ‘수어가 잇다. 우리가 있다’가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신촌 연세로 일대에서 열린다. 개회식은 오전 11시에 시작하며, 주최 측은 농인과 청인을 비롯해 약 2만 명의 시민이 행사장을 찾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번 문화제는 사단법인 한국농아인협회 서울특별시협회가 주최·주관하고 서대문구와 서울특별시,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에프엔코가 후원한다. 서대문구가 공개한 행사 안내에 따르면 현장에서는 개회식을 비롯해 수어골든벨, 수어문화공연, 홍보·전시·체험 부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손으로 울리는 골든벨, 눈으로 듣는 공연
이날 연세로에서는 수어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겨뤄보는 ‘수어골든벨’이 펼쳐진다. 문제를 풀고 답을 맞히는 과정에서 시민들은 수어가 단순한 손동작의 조합이 아니라 고유한 문법과 표현 체계를 지닌 언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수어문화공연은 목소리의 크기보다 몸짓과 표정, 리듬이 얼마나 풍부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무대다. 공연자의 손끝에서 노래와 이야기가 피어나고, 관객은 귀뿐 아니라 눈과 마음으로 무대를 감상하게 된다.
거리 곳곳에 마련되는 홍보·전시·체험 부스에서는 수어와 농문화를 보다 가까이 경험할 수 있다. 수어를 처음 접하는 시민에게는 새로운 언어의 문을 여는 시간이 되고, 농인에게는 자신의 언어와 문화가 거리의 중심에서 존중받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지난해 20주년을 맞은 서울특별시 수어문화제는 ‘응답하라, 한국수어’를 주제로 같은 신촌 연세로에서 시민들과 만났다. 올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어가 잇다. 우리가 있다’를 내걸었다. 수어로 이어지는 사람과 문화, 그리고 각자의 이야기가 모일 때 비로소 ‘우리’가 완성된다는 의미다. 주최 측 역시 올해 축제를 “수어로 이어지는 사람과 문화,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로 소개하고 있다.
수어는 배려를 위한 몸짓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
수어를 장애인을 돕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한국수어는 한국어를 손으로 옮겨 표현한 단순한 몸짓이 아니다. 고유한 문법과 문화적 배경을 지닌 독립된 언어다.
2016년 제정된 「한국수화언어법」은 한국수어가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한 언어임을 명시하고 있다. 법은 한국수어의 발전과 보전 기반을 마련하고, 농인과 한국수어 사용자의 언어권과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수어는 대한민국 농인의 공용어이기도 하다. 국가법령정보센터 「한국수화언어법」
법이 수어의 지위를 선언했다면, 문화제는 그 언어가 시민의 일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하는 자리다. 농인과 청인이 서로를 일방적으로 돕거나 이해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이웃으로 마주 서게 한다.
수어를 모르는 시민도 축제에 참여할 수 있다. 손동작 하나를 배우고, 수어 공연을 바라보고, 농문화에 관한 설명을 듣는 작은 경험이 낯섦을 걷어내는 첫걸음이 된다. 한 번의 체험이 곧바로 모든 장벽을 허물지는 못하더라도,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미는 순간 소통의 길은 열린다.
말이 닿지 못한 곳까지 이어지는 하루
도시는 수많은 말로 가득하지만, 정작 누군가의 언어를 알아보지 못한 채 지나칠 때가 많다. 들을 수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방송과 공연, 안내 체계 속에서 농인의 언어권은 때때로 배려나 선택의 문제로 밀려난다.
그러나 언어는 누구에게 허락받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정보를 얻으며, 문화를 누리고, 사회에 참여하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다.
제21회 서울특별시 수어문화제는 거창한 구호보다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장면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 한 사람이 손을 움직이고, 다른 사람이 그 손을 바라보는 순간. 표정과 몸짓을 놓치지 않으려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그때 소통은 소리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거리를 잇는다.
9월의 신촌에서 펼쳐질 것은 단지 하루 동안의 축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언어로 마음껏 웃고 이야기하는 광장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금껏 알지 못했던 이웃의 언어를 처음 만나는 교실이다.
수어가 이어지면 사람이 보인다. 사람이 보이면 비로소 우리가 있다.
행사 안내
행사명: 제21회 서울특별시 수어문화제 ‘수어가 잇다. 우리가 있다’
일시: 2026년 9월 19일 토요일 오전 10시~오후 5시
개회식: 오전 11시
장소: 서울 신촌 연세로
예상 참가 인원: 약 2만 명
주요 행사: 개회식, 수어골든벨, 수어문화공연, 홍보·전시·체험 부스
주최·주관: 사단법인 한국농아인협회 서울특별시협회
후원: 서대문구, 서울특별시,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에프엔코 등
* 행사 내용이 일부 다를 수 있으니, 상세 내용은 행사 주최 또는 주관측에 문의하면 된다.
[정기자의 뉴스정원]
눈 쌓인 거인의 정원을 몰래 찾은 아이들이 앉았던 나무에만 봄이 찾아와, 결국 거인이 쌓았던 벽들을 허물고 정원을 개방한다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단편 소설 "거인의 정원(The Selfish Giant)"처럼, 담장 밖 뉴스들은 잠시 지우고, '정기자의 뉴스정원'에서는 세상에 채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 같은 문화 뉴스들만 골라 시민 여러분께 개방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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