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허 내려놓겠다는데 돈 없으니 내년에 오라니…" 헛걸음 친 고령운전자들의 한숨

이정윤 기자 발행일 2026-11-05 15:02:53 댓글 0
20만 원 올렸지만 문턱만 높아져… 주민센터 찾았다가 발길 돌리는 어르신들
 
[데일리환경=이정윤 기자]"교통사고 뉴스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해서 큰마음 먹고 주민센터를 찾았죠. 수십 년 잡던 운전대를 놓는 게 쉬운 결정도 아닌데, 담당 직원이 '올해 예산이 진작 끝나 지원금을 못 드리니 내년에 다시 오라'더군요. 위험하니 면허를 반납하라며 등 떠밀 땐 언제고, 정작 반납하러 가니 예산 타령을 합니까?"

서울 시내 한 주민센터를 찾았다가 발길을 돌린 70대 운전자 김 모 씨의 토로다. 사회적 시선과 안전에 대한 불안 속에서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지만, 돌아온 것은 행정의 '예산 부족'이라는 차가운 답변뿐이었다.

서울시가 추진 중인 '고령운전자 운전면허 자진반납 지원사업'이 매년 반복되는 예산 소진으로 삐걱거리고 있다. 면허를 반납하려는 어르신들은 헛걸음을 하고 있지만, 정작 관할 자치단체는 지원을 받지 못한 탈락자가 몇 명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시의회 유기훈 의원(사진)은 4일 열린 교통위원회 서울시 교통실 행정사무감사에서 이 같은 문제를 꼬집으며 서울시의 '깜깜이 행정'을 강하게 질타했다.

현재 서울시는 고령운전자의 면허 반납을 유도하기 위해 지원금을 10만 원에서 20만 원으로 상향 조정했고, 조례상 최대 30만 원까지 지급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지원 규모는 지난해 약 59억~60억 원, 올해 약 50억 5,000만 원 수준이다.

문제는 결심을 행동으로 옮긴 고령운전자들의 실제 수요를 정책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예산이 조기 소진되면 자치구 주민센터 창구에서는 신청자들에게 '다음 연도 재신청'을 안내하고 있다. 이동권 제약을 감수하면서까지 공공 안전을 위해 면허를 포기하겠다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행정이 스스로 늦추고 있는 셈이다.

더 심각한 대목은 이 과정에서 '밀려난 수요'에 대한 집계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자치구별로 언제 예산이 동났는지, 혜택을 받지 못하고 돌아선 어르신이 몇 명인지에 대한 데이터가 전혀 축적되지 않고 있다.

유 의원은 "언제, 어느 자치구에서, 몇 명이 지원받지 못했는지에 대한 통계가 없다면 다음 연도 예산은 도대체 어떤 근거로 세우는 것이냐"라며 "단순히 전년도 집행 실적에 맞춰 숫자를 끼워 맞추는 방식에서 벗어나 실제 현장의 수요를 반영한 과학적 추계가 절실하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여장권 서울시 교통실장은 "예산 소진 시점 등 관련 자료를 확인해 향후 지원 수요를 추계하는 데 활용하겠다"고 답했다.

고령운전자 면허 반납은 단순한 혜택 지급이 아니라 시민 안전과 직결된 대표적인 예방 행정이다. 평생의 이동권을 내려놓는 어르신들의 결단을 '예산 조기 마감'이라는 핑계로 돌려보내는 일이 반복된다면, 정책의 신뢰성은 물론 안전 확보라는 본래 취지마저 퇴색될 수밖에 없다. 서울시가 25개 자치구와 함께 조속히 탈락자 수요를 전수 관리하고 현실적인 예산 대책을 내놓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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