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욱의 종교와 기하학] 제8편, 유월절 저녁 예식과 십일조 '144,000', 그리고 예수와의 관계 속에 태어나는 '빛의 탄생'

정진욱 칼럼니스트 기자 발행일 2026-07-24 07:04:55 댓글 0
▲ 종교와 기하학, 칼럼니스트 정진욱


성경 출애굽기에는 유월절 저녁에 모두가 지켜야할 엄중한 규례가 나온다.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출애굽기 12:21~25)


유월절 양을 잡고 우슬초 묶음에 그 피를 적시어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이 오기까지 한사람도 집 문을 나서지 말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이 규례는 애굽을 탈출하는 한 세대에 그치지 않고 대대로,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로 못박는다.

이 유월절 저녁 규례는 출애굽 전 급히 행해지는 예식이다. 신약에서도 예수가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 출애굽의 논의를 시작했다. .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마태복음 17:3)

오늘 칼럼 마지막화에서는 유월절이 말하는 그날 저녁,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흠 없던 어린 양을 잡던 그날 저녁에 출애굽을 코 앞에 두고 급박하게 행해졌던 시간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유월절 저녁 예식에서 나오는 144,000명

창조 첫째 날의 구조를 보면, 하루는 저녁과 아침으로 나뉜다(창 1:5 참조). 저녁이 먼저요 아침이 그 다음이다. 이 순서 자체가 이미 의미심장하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세기 1:5)

첫째 날은 어둠에서 빛으로, 흠 없는 유월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있던 저녁에서 탈출이 시작된 출애굽이 있던 아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하루의 첫 구조 안에 담고 있는 것이다.


▲ 유월절 양을 잡던, 출애굽 즉 세상 탈출이 시작되기 전, 유월절 저녁 시간(PPT 생성)


그 저녁의 열두 시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떡을 떼신 유월절 만찬의 시간이다. 

단순한 만찬 시간이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생겨난 시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던 유월절의 흠 없는 양을 잡던, 급히 출애굽을 나서기 전 그 날의 저녁 시간인 것이다. 

이 열두 시간에 반지름 6을 대응시키면, 입체 구의 겉넓이 공식 4πr²에 따라 겉넓이는 4 × π × 6² = 144π가 된다.

평면의 원이 아니라 입체의 구로 넘어간다는 것은, 저녁이라는 시간이 단순히 하루의 한 조각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세계, 하나의 온전한 영역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유월절 저녁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월절 양으로 열두 제자를 품은, 그리고 그 안에서 새 언약이 세워진 온전한 하나의 입체인 구(球)였다. 예수는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시공간이란 입체를 입고 이 땅에 나타나신 것이다.

양자역학이 말하는 어떤 목적(빛의 탄생) 퀀텀 점프를 위한 양자 중첩, 양자 얽힘 같은 현상들이 보여 주는 관계(상호작용)처럼, 유월절 양을 잡던 그날 저녁의 모두가 영원히 지켜야할 예식, 즉 생명된 사람들의 빛의 탄생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이 있던 저녁시간 사람들과 중첩되고 얽히며 생명탄생을 위한 관계(상호작용)를 맺으시는 것이다.


저녁에 탄생하는 144,000과 십일조

성경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베드로후서 3:8)

이 말씀을 따라 144π에서 나온 144라는 숫자에 천(1000)을 곱하면 144,000이 된다. 이는 계시록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의 수로 나오는 바로 그 숫자다(계 7:4 참조). 

유월절 저녁, 어린 양의 죽음, 대대로 영원히 지켜야 할 그 규례 속에서 144,000이라는 수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또 하나, 하루 24시간을 가장 작은 단위까지 풀어 헤아려 보면, 144는 하루 1,440분 그 전체의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자리에 선다. 

십분의 일은 성경에서 낯선 개념이 아니다. 첫 열매와 처음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십일조의 정신이 시간의 구조 속에도 새겨져 있는 셈이다(레 27:30 참조).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고, 여기저기 산당을 짓고 사람이 정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다 멸망한, 그 민족의 뿌리조차 흩어져 버린 북이스라엘에 나오는 사람들이 정한 방식이 아닌,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정한 예식과 규례에서 나오는 십일조가 144,000명이다.

네가 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니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때에 드릴찌며 (출애굽기 29:38~39)

유월절 저녁이라는 거룩한 시간은 그 자체로 하루 전체 를 간통하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히 구별되고 인을 치신 십일조의 시간에 참예함이라고 읽을 수 있다.


'빛의 탄생'을 말하는 양자역학, 그 관계와 상호작용

이제 두 번째 이야기, 빛의 탄생으로 넘어갈까 한다. 

양자역학의 핵심은 결국 관계와 상호작용이다. 입자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관찰과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 상태가 결정된다. 

이는 신앙의 언어로 옮기면 매우 익숙한 그림이다. 양을 예비하시고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과, 그 앞에 서는 사람 사이의 관계다.

앞 칼럼에서 본, 흠 없는 양을 준비하는 숫자 '4'와 광에서의 40년과 예수의 40일. 셋째 날 반 때 "씨(하나님의 말씀)'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이 상호 관계를 한다.

"양자 중첩"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을 품은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선다.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처럼(요 13:34 참조), 하나님과 사람은 얽혀서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사랑과 은혜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양자 얽힘' 관계로 묶여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다. 보이지 않은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이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퀀텀 점프, 그 차이가 빛이 된다 전자가 낮은 궤도에서 높은 궤도로 뛰어올랐다가 다시 떨어질 때, 그 에너지 차이만큼 빛이 방출된다. 이것이 양자역학이 말하는 빛의 탄생 원리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역과 사람의 영역, 그 사이를 잇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가며 궤도를 오르고 또 떨어진다. 온전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다가, 다시 사람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바로 그 오르내림의 차이, 그 사이에서 생명된 빛이 탄생한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참조).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분명히 선언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 참조).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오르내리며 겪는 그 진동과 차이, 그것이 곧 세상을 비추는 빛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칼럼을 마치며

지금까지 반지름과 원, 구의 겉넓이, 양자의 중첩과 얽힘, 퀀텀 점프라는 물리학의 언어를 빌려 유월절 저녁과 빛의 탄생을 이야기해 보았다. 그러나 이 모든 숫자와 도형, 물리적 비유는 결국 하나의 결론을 향해 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참조).

숫자도, 원도, 구도, 양자의 언어도 결국 이 한 문장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유월절 저녁을 영원히 기억하라 하신 그 규례의 마음도, 궤도를 오르내리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 생명의 빛을 만들어내는 그 관계의 신비도, 모두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목적,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귀결된다. 

약 2천년 전, 이스라엘의 낮은 동네 베들레헴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던 창조물들을 다스리는 세상의 '왕' 대신 가장 비천하고 낮은 자로 육신을 입고 와, 자신을 부인하며 십자가를 매고, 세상에 채찍질을 당하고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육신은 십자가 위에 못박고,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영'을 살리실 거라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존한 채 믿음 속에 예수가 걸었던, 사람들을 향했던, 모든 사람이 다시 하나님을 향해 돌아오길 바랐던 길이 참으시던 '사랑'이다. 

이것으로 이 긴 '종교와 기하학' 칼럼의 여정을 마친다.


* 본 칼럼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개역한글판을 따랐으며, 본문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성경 읽기에 근거한 하나의 묵상적 해석입니다.

함께 보면 좋은 기사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깨끗한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 0 /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