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쳐나는 보리에 가격 하락 ‘비상’…정부·주정업계, 2만5천톤 긴급 매입 나선다

이정윤 기자 발행일 2026-08-08 08:16:30 댓글 0
주류 소비 감소에도 8개 주정회사 참여…농가 가격 방어에 힘 보탠다
2026년산 보리 생산량 증가로 산지가격 하락 우려가 커지자 정부와 주정업계가 시장에 쏟아질 물량을 흡수하기 위한 긴급 대응에 나섰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롯데칠성음료, MH에탄올, 서안주정, 서영주정, 일산실업, 진로발효, 창해에탄올, 풍국주정공업 등 8개 주정회사와 협의를 거쳐 2026년산 보리 과잉 생산 물량 가운데 2만5천톤을 주정용으로 특별 매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기존 계약재배 물량 4만톤을 포함하면 총 6만5천톤 규모의 보리가 주정용으로 흡수되는 셈이다.


이번 특별 매입의 배경에는 생산 증가에 따른 가격 하락 우려가 자리 잡고 있다. 올해 보리 재배면적과 생산량이 늘면서 시장에서 자체적으로 소화하기 어려운 물량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농산물은 일반 공산품과 달리 단기간에 생산량을 조절하기 어렵다. 이미 파종해 수확한 농산물이 한꺼번에 시장에 나오면 공급 증가가 곧바로 가격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수요 증가 없이 생산량만 늘어난 경우 가격 충격은 고스란히 농가가 떠안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수확 이후 시장에 풀리는 물량을 줄이기 위해 특별 매입 카드를 꺼낸 이유다.

주류 소비 줄어드는데도 8개 주정회사 참여

특별 매입 물량은 주정용으로 활용된다.

주정은 녹말이나 당분이 포함된 원료를 발효한 뒤 증류해 만든 고순도 알코올로 소주를 비롯한 주류 제조에 사용되는 주요 원료다.

눈여겨볼 대목은 최근 주류 소비 감소로 주정 사용량 역시 줄어드는 상황에서 관련 기업들이 추가적인 국산 보리 매입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농식품부는 보리 수급 불안 가능성이 커지자 8개 주정회사 및 농협경제지주와 과잉 생산 물량 처리 방안을 지속적으로 논의해 왔다. 그 결과 기존 4만톤의 계약재배 물량과 별도로 2만5천톤을 추가 매입하는 방안이 마련됐다.

정부로서는 시장에 나올 물량을 줄여 가격 급락 가능성을 낮출 수 있고 농가는 추가 판로를 확보하게 됐다. 주정업계는 원료 수요가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정부의 농산물 수급 안정 정책에 참여했다는 의미가 있다.

정혜련 농식품부 식량정책관은 “보리는 주요 식량작물 중 하나로 안정적 생산 기반을 유지해야 하는 중요한 품목”이라며 “이번 8개 주정회사의 보리 계약재배 및 특별 매입은 기업과 농업 상생의 모범사례이며 현장 농업인의 걱정을 덜고 수급 불안도 해소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앞으로도 농산물 생육과 수급 상황을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가격과 수급 불안에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2만5천톤 시장서 빼낸다…가격 하락 막을 ‘안전판’

이번 조치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는 ‘2만5천톤’이다. 기존 계약재배 4만톤과는 별도로 과잉 생산될 것으로 예상되는 물량 2만5천톤을 시장에서 추가로 흡수한다는 것이다.

농산물 가격은 공급량 변화에 민감하다. 소비가 크게 늘지 않은 상황에서 생산량이 증가하면 산지에서는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가격을 낮출 가능성이 커진다.

이 때문에 과잉 물량을 주정용이라는 별도의 수요처로 돌리는 것은 단기적으로 시장 공급량을 줄여 가격 하락 압력을 완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농업경제 전문가들이 농산물 수급 안정 정책에서 중요하게 보는 것도 이 같은 ‘시장 충격 완화’ 기능이다. 과잉 생산이 확인된 상황에서 아무런 조치 없이 물량이 시장에 한꺼번에 공급될 경우 가격 급락이 발생하고, 이후 농가가 재배를 크게 줄이면 다음 생산연도에는 오히려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이 나타나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특별 매입은 당장 발생할 수 있는 가격 충격을 줄이기 위한 안전판이라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전문가 시각 “매입은 응급처방…생산 단계부터 수급 조절해야”

다만 특별 매입만으로 보리 수급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됐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농업경제 분야에서 농산물 가격 안정을 위해 중요하게 보는 것은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고려한 사전적인 수급 관리다.

생산량이 크게 늘어난 이후 정부나 기업이 물량을 매입하는 방식은 가격 급락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만 결국 사후 대응이라는 한계가 있다.

특히 주정업계 역시 자체적인 시장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주류 소비가 지속적으로 감소해 주정 수요가 줄어든다면 매년 과잉 생산된 보리를 같은 방식으로 추가 매입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정부가 파종 이전부터 예상 생산량과 소비량, 재고 수준, 가격 전망 등을 농가에 보다 신속하게 제공하고 적정 재배면적을 유도하는 체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농업경제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분석에 따르면 농산물 수급 정책은 ‘가격이 떨어진 뒤 매입하는 정책’과 함께 ‘가격이 떨어지기 전에 생산량을 조정하는 정책’이 병행돼야 효과를 높일 수 있다.

농가 역시 시장 전망을 정확하게 알 수 있어야 작목과 재배면적을 합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기후변화까지 겹친 농산물 수급…예측 정확도가 경쟁력

농산물 수급 관리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도 정부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기후변화로 폭염과 집중호우, 가뭄 등 이상기후가 빈번해지면서 농산물 생산량을 과거보다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해에는 과잉 생산으로 가격 폭락을 걱정하지만 다음 해에는 기상 여건 악화로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가격이 급등할 수도 있다.

따라서 앞으로 농산물 정책의 핵심은 단순한 ‘매입 규모’보다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생산량과 소비량을 예측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기상정보와 재배면적, 작황, 소비량, 재고량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생산 초기부터 농가에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정교한 수급관리 시스템이 요구되는 이유다.

  ‘2만5천톤 매입’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농사다

이번 특별 매입은 분명 필요한 조치다.

이미 생산된 보리가 시장에서 제값을 받지 못하고 가격이 급락한다면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곳은 농촌 현장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와 농협, 민간 주정업계가 함께 2만5천톤의 추가 수요를 만들어낸 것은 농가의 불안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정부가 이번 대책을 ‘2만5천톤을 매입했다’는 성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정책의 진짜 성적표는 매입량이 아니라 이후 산지가격이다.

특별 매입 이후 실제 보리 가격이 어느 정도 안정됐는지, 농가의 판매가격과 소득이 얼마나 유지됐는지, 남아 있는 재고는 얼마나 되는지를 지속적으로 공개하고 점검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내년이다.

올해 과잉 생산된 보리를 기업들이 받아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더라도 내년 다시 같은 규모의 과잉 생산이 발생한다면 특별 매입을 반복해야 한다. 민간기업의 협조에 계속 의존하는 방식은 지속 가능한 수급정책이라고 보기 어렵다.

농민에게 필요한 것은 생산한 농산물을 정부가 사주는 구조가 아니라 처음부터 적정한 생산량을 판단할 수 있는 시장 정보와 안정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판로다.

정부 역시 ‘얼마나 사들였느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과잉 생산됐는가’를 살펴야 한다.

2만5천톤의 보리를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다음 농사에서는 2만5천톤의 긴급 매입이 필요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번 보리 특별 매입은 정부와 기업, 농업계가 함께 가격 급락을 막는 응급처방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응급처방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수급관리 체계를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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